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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

  • Writer: Mimi Son
    Mimi Son
  • Jun 22
  • 4 min read

Updated: Jun 24

6월 21일 새벽 4시 4분, 영축산 입구 어느 지점에서 퍼포머를 만나기로 되어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숲> 프로그램 중 하나로, 한 명의 퍼포머와 한 명의 관객이 새벽 4시 4분에 만나서 함께 영축산을 오르는 것이 이 퍼포먼스의 주요 이벤트다. 한 달 전, 호기롭게 예약했던 마음은 퍼포밍 날짜가 다가오면 올 수록 묘한 무게감이 더해지며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어쩌지? 영축산은 도대체 어디야? 4시 도착하려면 몇 시에 출발해야 하지? 뭘 입고 신고가지? 위험하진 않을까? 며칠 전부터 날씨를 체크하고, 영축산 인근을 구글 스트릿 뷰로 들여다보다가 어느 순간은 참여를 지원한 스스로의 결정에 후회가 밀려오기도 다시 쓸려나가기도 했다.


알람을 새벽 3시에 맞추고 밤 11시쯤 침대에 눕는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다. 알람을 재차 삼차 체크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준비해 놓은 옷을 입고 지체없이 나가자는 계획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해 본다. 잠은 여전히 오지 않는다. 퍼포머에게서 낮에 받은 문자를 다시 확인한다. 만날 장소의 주소, 짦은 지침사항 그리고 사진을 한장 보냈다. 어두운 공터에 나무 한그루와 그것을 둘러싼 원형 벤치가 있는 사진이다. 몇 시간 뒤에 저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 둘이서 산을 오르는구나… 신기하다. 무섭다… 그러다가 깜박 잠이 든다. 그리고 꿈을 꾼다. 날이 저문 어두운 공원에서 화장실을 찾고 있는 꿈, 왠지 무섭고 찜찜해서 화장실 가기를 망설이는 꿈, 단층의 집처럼 생긴 화장실 문이 잠긴 걸 확인하고 돌아서려는데 어떤 여자가 내 손을 확 잡아채는 꿈. 꿈에서 깨어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30분, 그렇게 나는 2시, 2시 20분, 2시 40분에 깨기를 반복하다가 3시 알람을 듣고 침대에서 나온다. 그리고 시뮬레이션했던 순서대로 후다닥 준비하고 카카오택시를 부른다. 새벽3시경 이태원. 집으로 귀가하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나만 유일하게 집에서 나온 사람 같아 보인다.


택시를 타는 그 순간, 정동이 시간과 공간, 내 몸에 가득 들어오는 느낌, 오감이 예민하게 살아나는 느낌,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택시 기사는 ‘월계로요!’ 한마디 하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 뒷자리에서 본 그의 모습은 엉성한 머리숱에, 볼이 움푹 패고 유난히 앉은 키가 작아 보이는 늙은 환자 같았다. 저승사자 같았다. 택시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낯섦이 내려앉고 긴장감이 엄습했다. 처음 가는 동네, 월계로44길. 기묘하다. 이게 뭐람. 잠이나 잘걸.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새벽 3시 48분. 드문드문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나는 택시를 기다리는 척한다. 나무 옆 벤치에 앉으려다가 검은 고양이 두 마리가 바닥에 앉아 있는 걸 발견하고는 섬뜩한 마음에 그냥 가로등 옆에 서 있기로 했다. 저 멀리서 누군가 걸어오는데 퍼포머라고 생각했다. 10미터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을 때 그냥 평범한 노년의 여자라는 걸 알았다. 노년의 여자가 내 곁을 지나치자 아까부터 땅에 앉아 있던 검은 고양이 두 마리가 깡충깡충 뛰며 그녀 주변으로 원을 그리며 돈다. 고양이 두 마리가 야밤에 밖에 앉아 주인을 기다린다고? 이것도 작가가 설정한 퍼포먼스인가? 기묘하고 섬뜩하다. 시간은 왜 이렇게 안 가는 거야? 엿가락처럼 축 처진 달리의 시계 이미지가 떠오르고, 건너편에 지나치게 밝은 24시간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와 달의 주기를 모티브로 만든 달모양 가로등, 비에 젖은 도로가 반사한 일그러진 빛들과, 적막함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잡음들이 나를 더욱 예민하게 만든다. 정동이 가득 들어온다. 시간은 정말 너무 천천히 흐른다. 빨리 4시 4분이 되기를 바란다. 더이상 혼자 있고 싶지 않다. 퍼포머가 1분이라도 늦으면 그냥 택시를 타고 집에 가야지.



무릎까지 오는 흰색 우비를 입은 퍼포머가 불쑥 나타났다. 무표정의 그는 내 이름을 확인하고 벤치에 앉더니 무심히 내게 비옷을 건넨다. 이 우비를 입고 가지고 오신 이어폰과 핸드폰을 연결하세요. 나는 문득 어제 그에게서 문자를 받는 순간부터 이 퍼포먼스가 시작되었던 게 아닐지 생각했다. 이어폰을 귀에 꽂자, 그가 내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 말도 없이 전화를 받았고,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화이트노이즈를 통해 그와 내가 연결되었음을 확인한다. 그렇게 벤치에 한참을 앉아 있었던 거 같다. 어쩌면 고작 10초 앉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현실의 시간성은 이미 상실되었고 더 이상 내가 어쩔 도리가 없는 다른 차원의 시간 안에 있는듯했다. 그간의 긴장과 이 순간의 어색함, 그리고 앞으로 한 시간 동안 겪을 기묘함을 위한 워밍업을 하듯 나는 그를 따라 아무 말도 없이 그 옆에 앉아 있었다.


그가 일어나서 산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는 두 팔을 앞뒤로 젓지 않은 채 아주 천천히, 정말 천천히 한발 한발 소리 내지 않고 걸었다. 기괴하고 무서웠다. 나는 그의 속도에 내 걸음을 맞추기 위해서 몇 번을 가다 서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천천히 걷는 것이 그토록 온몸의 근육과 코어의 힘을 쓰는지 몰랐다. 그 새벽의 공기도, 서울 변두리의 오래된 건물들도, 불이 꺼진 교회도, 젖은 흙냄새도 모두 처음 겪듯 새로웠다. 이 상황은 도무지 뭐란 말인가. 누군가 이 세계가 유지해 오던 속도 버튼을 잘못 눌러서 갑자기 모든 게 뒤죽박죽된 느낌. 산길로 접어들 때 또 한 번 생각했다. 아 무섭다. 내가 겪은 수많은 새벽 4시 중에서 지금 여기의 새벽 4시는 왜 이리 다른 느낌일까. 나는 죽음을 떠올렸다. 이 서늘한 기분이 설마 나의 죽음을 암시하는 복선은 아니겠지?


우리는 나무 데크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정상으로 향했다. 처음 나는 그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어둠은 금세 익숙해졌고 나는 풍경을 보기 시작했다. 길에 쌓인 젖은 나뭇잎, 깊고 검은 숲속, 조명에 비친 새벽 미스트, 죽은 지렁이 그리고 천천히 걷는 퍼포머. 나는 동시에 두 가지 소리를 듣는다. 실제 소리와 디지털로 변환되어 이어폰으로 들리는 또 다른 실제 소리. 두 소리가 묘하게 딜레이(지연)을 만드는 거 같았고 그것이 지금의 현실을 더더욱 비현실적으로 변환시킨다고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어폰으로 들어오는 잡음이 가장 나를 안전하고 편안하게 위로했다. 실제로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준 것은 나와 함께 걷는 그의 존재도, 어쨌거나 밝은 아침이 오고야 마는 시간의 흐름도 아닌 디지털 잡음들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 그를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그를 내 뒤에 배치하고, 그가 없는 풍경을 내 시야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검은 숲속이 무서워 그와 너무 떨어지지 않도록, 그의 소리를 실제로도 이어폰으로도 들을 수 있는 적정의 거리를 유지하며 앞서서 걸었다. 숲길을 걸으면서 나는 몇 번씩이나 팔에 소름이 돋았고 뒷목에 싸한 전율을 받곤 했다. 딱히 이유도 없이 그냥 그 상황이 그랬다.


정상을 5미터 정도 앞두고, 숲길 데크를 따라 길을 비추던 모든 조명이 동시에 꺼졌다. 그 순간 하늘이 내 눈에 들어왔다. 산 밑에서 출발할 때와 너무나도 다른 밝은 새벽 하늘이. 아... 살았다. 나는 정상에 놓인 벤치에 앉아서 도시를 내려다본다. 그도 내 옆에 앉아서 정면을 응시한다. 우리는 한마디도 섞지 않고 그 시간을 함께 보낸다. 나는 일어나서 도시의 전망을 바라다본다. 이어폰에서 새소리가 우렁차게 들린다. 좀 전까지는 조용하던 새들이 동시에 아침을 맞이하듯 지저귄다. 혹시 퍼포머가 준비한 디지털 새소리인가..? 라고, 의심할 즈음 갑자기 뚜우- 뚜우- 하는 통화 종료음이 들린다. 그가 통화를 끈것이다. 우리는 서로 단절되었다. 이제 서로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순간. 일방적인 단절이 당황스러웠지만, 그것은 예정된 것이기에 받아들여야 하는.


그는 일어나서 산 아래로 향해 걷는다. 각자의 시간으로 복귀하는 그 길을 함께 하고 싶지 않았다. 난 혼자서 정상에 남기로 결정하고 그를 향해 속으로 안녕-이라 인사한다. 그리고 또다시 한참을 산 정상에 앉아 있는다. 하늘은 빠른 속도로 밝아진다. 이어폰을 벗으니 사방에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이 우렁찬 새소리는 진짜였다. 이젠 무섭지 않다. 그가 내려간 길의 반대편 갈래로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이태원 스튜디오로 왔다. 허기를 채우고 수면제를 반 알 먹는다. 정말 죽은 듯이 자고 싶어서. 그리고 다시 일어났을 때 이것이 꿈이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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